북위 헌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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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위 헌문제는 북위의 황제로, 456년에 태자에 책봉되어 465년에 즉위했다. 치세 초반에는 풍태후의 섭정을 받았으며, 이후 친정을 시작하여 삼등 구품의 제도를 정비하는 등 효문제의 치세 기반을 마련했다. 그는 근면하고 공정한 정치를 펼쳤으나, 471년 아들 효문제에게 양위하고 태상황제가 되었다. 이후 풍태후의 미움을 받아 476년에 2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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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위 헌문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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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북위 헌문제 北魏獻文帝 |
전체 이름 | 퇀바(拓拔)씨 홍(弘) |
묘호 | 현조(顯祖) |
시호 | 헌문황제(獻文皇帝, "현명하고 문명적인" 의미) |
출생일 | 454년 8월 |
사망일 | 476년 (21세) |
묻힌 곳 | 운중 금릉(雲中金陵) |
계승 | 북위 황제 |
재위 기간 | 465년 6월 21일 - 471년 9월 20일 |
이전 | 문성제 |
이후 | 효문제 |
연호 | 천안(天安) 466–467 황흥(皇興) 467–471 |
아버지 | 문성제 |
어머니 | 원황후 |
배우자 | 사황후 |
배우자 유형 | 후궁 |
자녀 | 효문제 원희 원간 원우 원옹 원협 원상 장산공주 낙랑공주 팽성공주 낙안공주 고평공주 |
가문 | 탁발부 |
왕조 | 북위 |
2. 생애
456년 태자로 봉해졌고 465년 즉위했다. 치세 초기는 나이가 어려 승상 을혼이 실질적으로 통치하고 있었는데, 계모 풍태후가 을혼을 살해하자 칭제를 실시했다.
469년 친정을 개시하고, 장남 탁발굉(효문제)을 태자로 정했다. 삼등구품제를 규정하여 국내 통치를 정비해 다음 효문제의 전성기의 주춧돌을 쌓았다.
471년 태자인 탁발굉(당시 5세)에게 양위하고 스스로 태상황제라고 칭했다.
476년 풍태후의 미움을 받아 살해당했다. 당시 22세였다.[8][9]
2. 1. 즉위와 섭정
456년 문성제에 의해 태자가 되었고, 465년 즉위했다. 헌문제의 아내 풍태후는 태후로 존경받았고, 선문제의 사망한 어머니 이원황후는 사후에 원황후로 추존되었다.[6][7] 치세 초기에는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승상 을혼이 실질적으로 통치했지만, 계모인 풍태후(문성문명황후)가 을혼을 살해하고 칭제를 했다. 펑 태후는 섭정 과정에서 가수, 고운, 고려(高閭)를 보좌관으로 임명했다. 이후 그녀는 오빠 풍희(馮熙)를 의사 결정에 참여시켰다.469년 장남 탁발굉을 태자로 세우고 친정을 시작했다. 삼등구품제를 제정하여 국내 통치를 정비하여, 다음 효문제의 융성기의 초석을 다졌다.
471년 태상황제를 자칭하며 양위했다.
2. 2. 친정과 양위
465년에 즉위했다. 치세 초기에는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승상 을혼이 실질적으로 통치했지만, 적모인 풍태후(문성문명황후)가 을혼을 살해하고 칭제를 했다.[8]469년에 장남인 탁발굉(효문제)을 태자로 세우고 친정을 시작했다. 삼등구품제를 제정하여 국내 통치를 정비하여, 다음 효문제의 융성기의 초석을 다졌다.[9]
471년에는 철학에 대한 관심 때문에 왕위를 물려주고 학문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싶어 했다. 그는 모든 관료들로부터 칭송받았던 그의 숙부 경조왕 탁발자추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싶어했다. 그래서 이 문제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조정 회의를 소집했다. 관리들은 대체로 헌문제의 제안에 반대했고, 헌문제가 왕위를 물려주고 싶다면 태자 굉에게 넘겨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 했고, 4세의 태자는 471년 9월 20일에 효문제로 즉위했다.[8] 헌문제 자신은 다음날 태상황제가 되었다.[9]
2. 3. 죽음
471년에 태자인 탁발굉(당시 5세)에게 양위하고 스스로 태상황제(太上皇帝)라고 칭했다.[8][9]476년 풍태후의 미움을 받아 살해당했다. 당시 22세였다. 사마광을 포함한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풍태후가 헌문제를 독살했다고 믿었지만, 또 다른 설에 따르면 풍태후는 헌문제가 그녀에게 문안 인사를 하러 왔을 때 암살자를 시켜 그를 붙잡아 질식사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저우스위안의 연구에 따르면 풍태후가 군주를 살해했다면 혼란이 일어났을 텐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저우스위안은 풍태후를 몰아내려는 시도가 실패한 후 헌문제가 자살했다는 이론을 제시했다. 헌문제가 죽고 순조롭게 정권이 이양된 후, 풍태후는 효문제의 섭정을 맡았다.
3. 가계
배우자 | 자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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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존 황후 사황후 이씨(思皇后 李氏) (?~479) | 제1황자 : 북위 효문제 원굉(元宏) |
후궁 소의 봉씨(昭儀 封氏) | 제2황자 : 함양왕 탁발희(拓跋禧) |
후궁 귀인 한씨(貴人 韓氏) | 제3황자 : 조군령왕 탁발간(拓跋幹) (?~479) |
제5황자 : 고양문목왕 탁발옹(拓跋雍) (?~528) | |
후궁 귀인 반씨(貴人 潘氏) | 제6황자 : 팽성무선왕 탁발협(拓跋勰) |
후궁 초방 맹씨(椒房 孟氏) | 제4황자 : 광릉혜왕 탁발우(拓跋羽) (471~501) |
후궁 초방 고씨(椒房 高氏) | 제7황자 : 북해평왕 탁발상(拓跋祥) (476?~504) |
생모 미상 | 상산공주 |
낙량공주 | |
팽성공주 | |
낙안공주 |
4. 연호
5. 평가
헌문제는 황제로 즉위하면서 근면하고 상벌을 적절하게 내린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정직한 관료를 등용하고 부패한 관료를 파면하는 데 뛰어났으며, 그의 재위 기간부터 북위 관료들이 정직하다는 칭찬을 받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도교와 불교 등 종교와 철학 연구에도 심취했다. 헌문제는 문제가 폐지했다가 곧 재개했던 15개의 비정규 세금을 폐지하여 백성의 생계를 점차 나아지게 했다.[8]
470년, 헌문제는 모용백요가 의부혼이 권력을 잡고 있을 때 아첨한 것에 앙심을 품고, 모용백요에게 반역 혐의를 씌워 아들 모용여의와 함께 처형했다. 이는 그의 재위 기간 중 드물게 보이는 행동이었다.
참조
[1]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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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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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The Empire of the Steppes
https://archive.org/[...]
Rutgers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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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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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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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8]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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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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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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